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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이 들려주는 옛 마을의 이야기


장승이 들려주는 옛 마을의 이야기

마을 어귀에 우뚝 솟은 장승들은 오래된 이야기들을 품고 서 있다. 바람이 스치면 장승의 얼굴에 새겨진 주름마다 지난 세월의 흔적이 흘러가고, 나무결 사이사이로 스며든 햇살이 그들의 표정을 더욱 깊이 새긴다.

오늘, 나는 이 장승들이 서 있는 곳을 찾았다. 하늘은 청명하고, 겨울을 지나온 나무들은 아직은 앙상한 가지를 뻗고 있다. 하지만 장승들은 언제나처럼 당당하다. 길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조용히 말을 건네는 듯하다.

장승은 단순한 나무 기둥이 아니다. 그것은 마을의 수호신이자 안내자이며, 때로는 위엄을 가진 장군의 모습으로, 때로는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는 벗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있었다. 장승이 세워진 유래를 살펴보면, 옛 선조들은 마을과 길목을 지키기 위해 이들을 세웠다. 길손들에게 방향을 알려주고, 마을로 들어오는 나쁜 기운을 막아주며, 사람들의 염원을 담아 서 있었다.

사진 속 장승들도 마찬가지다. 나무의 결을 따라 새겨진 얼굴들은 저마다의 개성을 지니고 있다. 어떤 장승은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고, 또 어떤 장승은 미소를 머금은 듯하다. 몸통에는 ‘天下大將軍(천하대장군)’과 ‘地下女將軍(지하여장군)’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는 남성과 여성의 기운이 조화를 이루며 마을을 지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과거 장승은 단순한 조형물이 아니었다. 그 자체로 신앙의 대상이었고, 마을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상징이었다. 농사를 짓는 이들은 장승 앞에서 한 해의 풍년을 기원했고, 먼 길을 떠나는 이들은 무사 귀환을 기도했다. 때로는 혼례를 앞둔 청춘들이 이곳을 지나며 부부의 인연을 빌었고, 마을 사람들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장승에게 기대어 마음을 달랬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장승도 점차 그 의미를 잃어갔다. 콘크리트 도로가 깔리고,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마을 어귀의 장승들은 하나둘씩 사라졌다. 이제는 관광지나 민속촌에서나 그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장승은 우리의 문화 속 깊은 곳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사진 속 장승들을 바라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들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기도를 들어주었을까? 얼마나 많은 계절을 지나오며 비바람을 견뎌왔을까? 나무의 결을 따라 흘러간 세월이 이들에게는 하나의 주름이 되었고, 그 주름 속에는 우리 조상들의 소망과 염원이 깃들어 있을 것이다.

나는 장승 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가만히 손을 뻗어 나무의 표면을 어루만져 본다. 차가운 듯하면서도 묵직한 온기가 느껴진다. 나무는 말을 하지 않지만, 그 표면에 새겨진 흔적들은 수많은 이야기들을 전해준다. 그것은 이곳을 지나간 수많은 이들의 흔적이며, 오랜 시간 동안 마을을 지켜온 장승의 기억이다.

어쩌면 우리는 장승처럼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묵묵히 그 자리에서 마을을 지키고, 누군가에게 길을 알려주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조용한 위로를 전하는 존재로 말이다.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어도, 장승이 그러하듯 우리는 저마다의 자리에서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장승 앞을 떠나며 다시 한번 뒤돌아본다. 햇빛을 받아 더욱 선명해진 그들의 표정이 마치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듯하다. "언제든 다시 오라"고, "우리는 언제나 이곳에서 너를 기다릴 것"이라고.

나는 미소를 머금고 발걸음을 옮긴다. 오늘의 장승은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오래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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