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립문 너머의 시간
사립문, 그 경계에서 배우는 삶의 지혜
어릴 적 할머니 댁을 찾을 때마다 가장 먼저 맞이해주던 건 낡은 나무 사립문이었다.
오래돼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지고, 경첩엔 녹이 슬어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런데 그 소리는 이상하게도 불편하지 않았다. 마치 오랜 벗이 다정하게 건네는 인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립문이 가진 독특한 매력
사립문은 참 묘한 존재다. 대문처럼 위엄 있지도 않고, 담장처럼 단단히 막지도 않는다. 열려 있는 듯 닫혀 있고, 닫혀 있는 듯 열려 있다. 틈새 사이로 바람이 스며들고 햇살이 살짝 기웃거린다. 고양이가 살금살금 몸을 비비며 지나가고, 봄이면 담쟁이덩굴이 파릇한 얼굴을 내밀기도 한다.
요즘의 집들은 대부분 철문이나 자동문이다. 버튼을 누르면 가볍게 열리고, 센서가 알아서 닫아준다. 편리하긴 하지만 그 속도감이 오히려 아쉽다. 문을 열 때의 잠깐의 망설임, 손잡이를 돌리는 순간의 감촉, 그리고 문 너머에 펼쳐질지 모르는 작은 놀라움들. 그 모든 ‘사소한 경험’이 사라져 버린 듯하다.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문
사립문 앞에 서면 누구든 발걸음이 자연스레 느려진다.
무심히 밀치고 들어갈 수도, 무작정 지나칠 수도 없다. 문틈 너머를 살짝 들여다보게 된다.
마당에 걸린 빨래, 고추와 상추가 자라는 화분, 평상에 앉아 라디오를 들으시는 할아버지의 모습. 이런 소박한 풍경들이 사립문 틈새로 흘러나와 거리를 따뜻하게 덮어주곤 했다.
생각해보면 인생도 사립문 같다. 누구에게는 마음을 활짝 열지만, 또 누구에게는 조심스럽게 거리를 둔다. 완전히 열려 있지도, 완전히 닫혀 있지도 않은 그 애매한 경계 속에서 우리는 타인과 관계를 맺고 세상과 소통한다.
경계 속의 투명함
립문이 주는 매력 중 하나는 바로 ‘투명한 경계’다.
철문처럼 꽉 막혀 있지 않아 숨길 것도, 숨겨질 것도 많지 않다. 안과 밖이 적당히 섞이며 자연스러운 소통이 이어진다.
“오늘 김치 담그시네요?”
“아이가 많이 컸네요.”
“감기는 다 나으셨어요?”
이런 따뜻한 안부 인사가 오가는 공간, 그게 바로 사립문 앞이었다. 작은 틈새가 만들어낸 대화는 그 자체로 공동체의 온기를 지켜주는 울타리였다.
사라져가는 사립문, 그리고 아쉬움
도시화가 진행되고 아파트가 늘어나면서 사립문은 점점 사라져 갔다.
프라이버시가 중시되는 시대에 사립문은 낡은 과거의 유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건 완벽한 차단이 아니라, 적당한 소통의 여지 아닐까.
최근에는 ‘소셜 디스턴싱’이라는 말이 일상이 되었다.
물리적 거리는 지켜야 하지만 마음의 거리는 가깝게 유지하자는 뜻으로 시작된 말이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오히려 마음의 거리가 멀어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런 시대일수록 사립문의 지혜가 필요하다.
완전히 끊어내지 않으면서도 서로를 존중하는 경계. 그것이 건강한 관계의 비밀일지 모른다.
다시 만난 사립문
얼마 전, 오랜만에 할머니 댁 근처 골목을 걸었다.
세월이 흘러 예전의 사립문들은 대부분 철문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러나 단 한 집만큼은 여전히 낡은 나무 사립문을 지키고 있었다.
문틈 사이로 작은 마당이 보였고, 그곳에는 할머니 한 분이 콩을 고르고 계셨다.
눈이 마주치자 그분은 환하게 웃으며 “어서 오세요” 하고 인사를 건네셨다.
그 순간 깨달았다. 사립문은 단순한 문이 아니었다.
마음과 마음을 잇는 다리, 삶과 삶을 이어주는 따뜻한 통로였다.
완전히 열지도 닫지도 않는 그 경계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소통의 방법을 배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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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하며
사립문은 사라져가는 옛 풍경이지만, 그 속에 담긴 삶의 지혜는 여전히 유효하다.
차단과 단절이 아닌, 적당한 경계와 소통.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공동체의 정신이다.
언젠가 길을 걷다 사립문을 만나면, 잠시 멈춰서 그 너머의 따뜻한 삶을 들여다보길 권한다.
그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오래된 그리움과 안도가 번져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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