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자목련 아래에서
물오른 봄날, 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진 자목련의 자태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풍경 속에 피어난 한 편의 시와 같았습니다. 붉고 연한 빛이 겹겹이 어우러진 꽃잎들은 아침 햇살을 받아 은은히 빛나고, 그 안에는 봄이 품은 따뜻한 숨결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바람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아래, 그 꽃들은 아무 말 없이도 사람의 마음을 조용히 끌어안는 힘이 있었습니다.
자목련은 봄의 시작을 알리는 꽃 중 하나입니다. 그 어떤 꽃보다 먼저 가지 끝에서 피어나는 모습은 마치 기다려온 누군가를 향한 반가움처럼 다가옵니다. 나뭇잎보다 먼저 피는 이 꽃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순수한 마음처럼 다소곳하게, 그러나 당당히 제 존재를 드러냅니다. 그 모습이 마치 늦봄을 기다리는 우리의 마음 같기도 합니다. 긴 겨울을 견디고 나서야 만날 수 있는, 애틋한 기다림의 결실이기 때문입니다.
이날 찍은 자목련은 유난히 고왔습니다. 꽃잎은 안쪽에서부터 붉은빛이 배어나오듯 퍼져 나가고, 끝으로 갈수록 연해지며 투명한 빛을 머금고 있었습니다. 배경으로 보이는 단정한 아파트 건물과 맑디맑은 하늘은 오히려 자목련을 더 돋보이게 했습니다. 복잡하지 않은 구도 속에서 자목련은 중심에 서 있었고,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사진기 너머로 바라보는 그 순간, 저는 계절의 숨소리를 들은 듯했습니다.
이런 장면을 마주할 때면 늘 마음 한켠이 촉촉해집니다. 아마도 자목련이 지닌 추억 때문이겠지요. 어릴 적 집 마당에 있던 자목련나무는 매년 봄이면 어머니가 꼭 한 번씩 바라보시던 꽃이었습니다. “올해는 유난히 꽃이 크다” 하시며 살짝 웃으시던 얼굴이 문득 떠오릅니다. 그 시절 어머니의 눈빛과 함께 피었던 꽃이 지금 다시 눈앞에 피어 있으니, 시간이 흐르고 삶이 변해도 봄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셈입니다.
사진을 찍으며 다시금 느꼈습니다. 자연은 우리보다 한 발 앞서 움직이지만, 때가 되면 꼭 돌아와 위로를 건넵니다. 자목련은 단순한 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나온 시간에 대한 기록이며, 다시 맞이할 계절에 대한 약속입니다. 지금 이 순간의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도 충분하지만, 그 속에는 견뎌낸 시간과 다가올 시간에 대한 감동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봄꽃이 피는 이유는 단지 생명의 순환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괜찮다’고 말해주는 자연의 목소리이기도 합니다.
돌아오는 길, 자목련 아래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습니다. 그리고 사진기 없이도 오랫동안 바라보았습니다. 마치 꽃이 말을 걸어오는 듯했습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잘 견디셨어요.” 그 말에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자연의 언어는 짧고도 깊습니다. 그리고 자목련은 그중에서도 가장 다정한 목소리를 지녔습니다.
올해 봄은, 자목련 덕분에 더욱 환해졌습니다. 피는 꽃도, 바라보는 마음도 모두 따스한 봄날이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이렇게 사진을 찍고, 글을 쓰고, 기억을 남기는 이유도 바로 이 순간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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