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리성지 십자가의 길에서
신리성지 십자가의 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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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잔디밭에서 |
신리성지의 넓은 잔디밭 위로 푸른 하늘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그 한가운데,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님의 형상이 새겨진 돌이 서 있다. 마치 그 자리에 오랫동안 머물며 수많은 사람들의 기도를 들었던 듯, 묵묵한 표정으로 시간을 품고 있다.
겨울의 흔적이 남아 있는 잔디밭은 아직 생명의 빛을 되찾지 못한 듯 보인다. 누렇게 마른 잔디가 바람에 흔들릴 뿐, 봄의 기운은 아직 스며들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듯, 생명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깨어나고 있을 것이다. 차가운 땅 아래에서 새싹은 준비하고, 따뜻한 계절이 오면 다시 푸르게 일어설 것이다.
십자가를 짊어진 채 걸어가는 예수님의 모습은 그 길이 얼마나 무거운 것이었는지를 조용히 이야기해 준다. 무거운 나무를 등에 짊어지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온몸에 스며들었을 고통과 인내. 하지만 그 길은 단순한 고통의 행렬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사랑의 길이었다. 신리성지의 이 조각상은 그 사랑을 기억하라는 듯, 잔디밭 위에서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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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리성지 전시관 |
멀리 언덕 위에 자리한 성당이 눈에 들어온다. 성당으로 가는 길은 낮고도 단정한 언덕을 따라 이어져 있다. 십자가의 길처럼, 신앙의 길도, 삶의 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힘겨운 순간을 지나야만 닿을 수 있는 곳, 포기하지 않고 걸어야만 맞이할 수 있는 은총의 자리. 지금은 메마른 잔디 위에서 이 길을 걷지만, 머지않아 이곳에도 따뜻한 햇살이 내리고, 다시 푸르른 생명이 가득할 것이다.
나는 묻는다. 지금 나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그리고 내 어깨에는 어떤 십자가가 놓여 있는가. 신리성지의 잔디밭을 스치는 바람이 나지막이 속삭인다. "멈추지 말고 걸으라, 너의 걸음 끝에도 빛이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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