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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독대

장독대, 시간을 담다


장독대는 시간을 품은 공간이다. 둥글고 투박한 항아리들이 한데 모여 낮은 돌담 위에 자리 잡고 있다. 햇살을 머금은 항아리들의 표면에는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다. 저마다 색이 다르고, 크기도 다르지만, 모두가 한결같이 묵묵한 자세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바람이 불어오면 항아리들이 낮게 숨 쉬는 듯하고, 옆에 쌓인 짚더미는 사그락거리며 반응한다. 장독대가 있는 이곳은 한 세대의 삶이 깃든 공간, 그리고 그보다 더 오랜 역사가 흐르는 자리다.


어릴 적 할머니 댁에도 이런 장독대가 있었다. 마당 한편에 늘 장독들이 놓여 있었고, 뚜껑을 열면 그 안에는 깊은 향기가 배어 있었다. 된장, 간장, 고추장, 그리고 때때로 술까지. 장독은 단순한 그릇이 아니라 시간과 정성을 담는 그릇이었다. 겨울을 지나 봄이 오면 장독을 열어 장을 가르고, 간장과 된장의 깊어진 맛을 확인하던 어머니의 손길이 떠오른다.


장독은 자연의 흐름과 함께 숨 쉰다. 장을 담그면 오랜 시간 발효되며 맛이 깊어진다. 너무 급하게 먹으면 아직 덜 익은 맛이 나고, 너무 오래 두면 짜고 강해진다. 인생도 장독 속 장처럼 시간이 필요하다.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익어가야 제 맛이 난다. 장독을 관리하는 일은 마치 삶을 가꾸는 것과도 같다. 겨울에는 찬바람을 견뎌야 하고, 여름에는 뜨거운 햇살 아래서 숨 쉬어야 한다.


장독대를 바라보면 한국인의 삶이 보인다. 오래된 집들마다 장독대는 한쪽에 자리하고 있다. 가족의 밥상을 책임지는 공간이면서도, 조용히 그 자리를 지키는 존재다. 어머니가, 할머니가 손수 담가 오래도록 지켜온 장이 그 속에서 익어가듯, 가족의 사랑도 그렇게 익어갔다. 요즘은 공장에서 만들어진 장을 사다 먹는 일이 많아졌지만, 장독대가 품고 있던 정성만큼은 쉽게 대체할 수 없다.


사진 속 장독대 옆에는 볏짚을 쌓아 만든 작은 짚더미가 있다. 이는 마치 작은 움막처럼 보인다. 아마도 겨울을 나기 위해 만든 짚가리일 것이다. 장독대와 짚더미, 두 요소가 나란히 놓인 모습은 과거의 농촌 풍경을 그대로 담고 있다. 자연과 사람이 함께 어우러지며 살아가던 시절의 흔적이다.


장독대의 의미는 단순한 저장 공간을 넘어선다. 그것은 전통의 보존이자, 시간이 만들어내는 깊은 맛의 산물이다. 어머니의 손길이 닿아 있던 그 장독들이 없었다면, 우리의 식탁은 한결 밋밋했을 것이다.


오늘날 장독대는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도시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풍경이 되었고, 시골에서도 대형 플라스틱 통이나 스테인리스 통으로 대체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여전히 장독을 사용하는 이들은 안다. 그 속에 담긴 것은 단순한 양념이 아니라, 가족의 이야기이고, 세월의 흔적이며, 자연이 빚어낸 조화라는 것을.


장독대 앞에서 한참을 바라본다. 햇살을 받으며 묵묵히 서 있는 항아리들. 그 속에서 장이 익어가듯, 우리의 삶도 그렇게 천천히 익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급하게 살기보다, 장독 속 장처럼 자연의 흐름에 몸을 맡기며 천천히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지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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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독대는 그저 오래된 풍경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삶의 방식이며, 시간이 만들어낸 가장 자연스러운 맛이다. 우리도 장독처럼 깊어지고, 단단해질 수 있을까. 삶의 바람을 견디며, 시간을 품어내는 장독처럼, 우리도 그렇게 삶을 익혀가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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